결의안 68호: 베트남의 민간경제 격상 선언, 그 배경과 핵심
2026 베트남 정치 흐름 읽기(2) - 공산국가가 민간기업 자본가를 지지하기 시작하다
지난 1편에서는 베트남이 40년간 유지해온 국가 운영 시스템을 통째로 갈아끼운 이야기를 다뤘습니다. 1인 체제로의 권력 집중, 행정 통폐합, 간부 순환제. “누가, 어떤 구조로 나라를 운영할 것인가”를 재설계한 거죠.
이번 2편에서는 그 구조 재편과 동시에 경제 쪽에서 진행되고 있던 또 하나의 변곡점을 다룹니다. 2025년 5월, 베트남 공산당은 공식 문건에서 민간경제를 “가장 중요한 원동력”이라 선언했습니다. 헌법에 국영경제 주도적 역할을 명시하고,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국가 정체성으로 내걸고 있는 나라에서요. 1편에서의 통치 구조 재편이 끝난 뒤에 이 선언이 나온 게 아닙니다. 두 작업은 같은 시기에 병렬로 진행된 밑작업이에요. 정치 구조와 경제 정책을 동시에 뒤집은 겁니다.
이 선언이 담긴 결의안 68호가 왜 전례 없는 사건인지, 그리고 이 거대한 경제 실험을 실행할 키맨으로 떠오른 레민흥(Lê Minh Hưng)은 누구인지, 풀어보겠습니다.
핵심 요약
반부패 캠페인 Đốt Lò(불타는 화로)의 성과와 부작용. 8년간 168,000명 징계, GDP 6% 규모 금융 스캔들 적발. 동시에 관료 결재 기피로 인한 경제 행정 마비 발생.
결의안 68호, 전례 없는 민간경제 격상 선언. 민간경제를 ”가장 중요한 원동력”으로 격상하고, 비범죄화 조항과 대규모 인센티브 패키지를 단일 문건에 포괄. 현존 공산국가 중 유일한 사례.
결의안 68호 내에서는 2030 대기업 육성 목표와 재벌 모델을 제시 글로벌 대기업 20개 육성 목표. 한국 재벌에서 영감을 받되, 국가가 숫자 목표를 먼저 세우고 위에서 설계하는 방식 채택.
레민흥, 정치국 유일의 경제 전문가. 정치국 19인 중 경제/금융 테크노크라트는 레민흥(서열 4위) 단 1명. 수상 후보로 부상한 가운데 4월 국회 인준이 이 경제 실험 본격화의 신호탄.
1. 반부패의 역설, 부패를 잡자 경제가 위축되다
하노이에서 교통경찰에게 잡히면, 올해부터는 이전과는 사뭇 다른 방식의 절차가 진행됩니다. 올해부터는 베트남 교통 경찰이 바디캠을 켜고 검문 전 과정을 녹화하기 시작하는데, 2026년부터 영상 증거 없이는 과태료 자체를 부과할 수 없게 바뀌었거든요. 베트남에서 오래 살아본 분이라면 아실 거예요. 교통 단속 현장에서 ‘합의’라는 이름의 비공식 관행이 오랫동안 존재해왔다는 걸요. 바디캠은 그러한 관행 자체를 구조적으로 끊어내려는 장치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베트남 사회의 투명성을 높이는 아주 긍정적인 변화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베트남 교통경찰의 부정부패 문제는 작은 사례에 불과해요. 슬프게도 베트남은 사회 곳곳에 부정부패가 깊이 뿌리내려 있던 나라였습니다. 그리고 이 부패를 국가 차원에서 뿌리째 뽑으려 한 것이 바로 반부패 캠페인 ’Đốt Lò(돗러, 불타는 화로)’입니다.
화로에 불을 지핀 사람들
‘Đốt Lò(불타는 화로)’라는 캠페인명은 故 응우옌푸쫑 前 서기장의 발언 속 비유에서 유래되었습니다.
“Lò nóng lên rồi thì củi tươi vào cũng phải cháy.” — 화로가 충분히 뜨거워진다면 생나무도 결국 탈 수밖에 없다.
아마, 장작을 때 본 분들은 아시겠지만, 보통 생나무는 물기가 많아서 불에 잘 타지 않습니다. 마른 장작이나 적당히 건조된 나무를 써야 화로에 제대로 불이 붙죠. 그런데 화로 자체가 충분히 뜨거워지면, 생나무를 넣어도 결국에는 활활 탈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여기서 화로(Lò)는 반부패 시스템 자체를 뜻하고, 마른 나무는 비리가 너무나 명백해서 바로 잡을 수 있는 관료, 생나무는 고위직이라 건드리기 어려웠던 대상을 가리킵니다. 결국 이러한 비유를 통해서 故 응우옌 푸 쫑 前 서기장은 직급이 아무리 높아도, 비리가 아무리 오래 전 일이어도, 당국의 발전을 위해 예외 없이 관련자를 처벌하겠다고 공언한 셈이지요. 더하여, 이렇게 화로를 충분히 뜨겁게 만들어서 베트남 사회 전체가 투명하고 청렴함을 추구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하겠다는 의지가 담긴, 정말로 멋진 비유였습니다.
불타는 화로 캠페인은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화로는 정말로 뜨겁게 불타올랐습니다. 베트남의 미래를 위해 부패는 반드시 척결해야 했었고, 응우옌 푸 쫑 서기장은 예외 없이 부패한 나무들을 태워냈습니다. 캠페인이 시작된 2016년부터 8년간 2,700개 이상의 당 조직과 168,000명의 당원이 징계를 받았고, 그 중에는 현직·전직 중앙위원 33명, 고위 군 장교 50명이 포함돼 있습니다. 국가주석 2명과 부총리 2명이 줄줄이 사임했고, 2022년에는 항공·부동산·음료 업계의 재계 상위권 대기업 총수 3명이 주가 조작, 사기, 횡령 혐의로 연달아 체포됐습니다. VCCI(베트남상공회의소)와 USAID가 공동으로 발표하는 PCI(지방경쟁력지수) 조사에 따르면 비공식 비용을 지불한다고 응답한 기업 비율도 2006년 70%에서 2021년 41.4%로 크게 낮아졌습니다.
참고로, 1편에서 집중적으로 조명했던 또 럼 現 서기장이 바로 이 캠페인의 실질적 집행자였습니다. 응우옌푸쫑 前 서기장 시절 8년간 공안부 장관으로서 수사의 칼자루를 쥐고 있던 행동대장이 바로 현재의 서기장 또럼이었죠.
국가 GDP의 6%를 날린 여자
그리고 이 화로가 태워낸 가장 거대했던 생나무가 바로 쯔엉미란(Trương Mỹ Lan)이에요.
쯔엉미란은 호찌민시에서 부동산 제국 반틴팟(Vạn Thịnh Phát) 그룹을 운영하던 여성 사업가입니다. 그녀는 10여 년에 걸쳐 수백 개의 페이퍼 컴퍼니와 차명을 동원해 사이공상업은행(SCB) 지분의 90% 이상을 은밀히 장악했습니다. SCB를 사실상 개인 금고처럼 쓰면서 천문학적인 금액을 빼돌렸습니다. 직접적인 횡령 기소 금액만 125억 달러(약 16조 원). 여기에 부실 대출 이자 손실, 은행 자본 잠식, 35,000명이 넘는 채권 투자자 피해까지 합산하면 총 경제적 피해액은 270억 달러(약 36조 원)에 달합니다.
이게 얼마나 큰 숫자냐면요, 자그마치 2023년 베트남 GDP의 약 6%입니다. 이 결과로 SCB에 뱅크런이 시작되었고 베트남 중앙은행(SBV)은 금융 시스템 붕괴를 막기 위해 240억 달러 이상의 특별 대출을 긴급 시행해야 했습니다. 사태의 수습을 위해 한 개인의 횡령으로 당시 전 국가 외환보유고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금액이 투입된 것입니다. 쯔엉미란에게는 결국 사형이 선고되었고, 이 사건은 전직 중앙은행 간부와 사정기관 관계자 85명이 함께 연루된, 단순한 개인 일탈이 아닌 구조적 부패 스캔들의 충격적 사례로 남게 되었습니다.
써사이(Sợ sai), 관료가 펜을 들지 않기 시작하다
부패를 척결하는 것 자체는 옳은 일이고 반드시 필요한 과정입니다. 화로는 뜨거워져야 했고, 부패한 나무들은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 언젠가는 불타야 했습니다. 허나, 시간이 흐르며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어요. 화로가 너무 급격하게 뜨거워진 나머지 나무뿐 아니라 화로 옆에서 일하던 일꾼, 즉 관료들까지 겁을 먹기 시작한 겁니다.
베트남어로 ’써사이(Sợ sai)’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직역하자면 ‘잘못을 저지를까 두려운 감정’입니다. 대규모 부패 척결 캠페인이 수년간 계속되면서 관료들 사이에 “괜히 결재 도장 찍었다가 나중에 처벌받으면 어쩌지?”라는 공포가 퍼졌습니다. 인허가 서류에 서명하는 것 자체를 기피하는 분위기가 관료 사회 전체에 확산된 거예요.
숫자를 보면 그 규모가 선명해집니다. OECD의 2025년 베트남 경제 서베이에 따르면, 2024년 베트남의 공공투자 집행률은 정부 계획의 3분의 2 수준에 머물렀습니다. 2021년부터 2023년 사이에는 공무원 6만 명이 자발적으로 사임했는데, 이는 전체 공공부문 인력 250만 명 규모를 감안하면 상당한 숫자입니다. CNN 등 외신이나 학계 전문가들은 이 상태를 ‘관료적 마비’라는 표현으로까지 진단했습니다.
부패 척결은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었고, 실제로 거대한 성과를 냈습니다만, 동시에 그 과정에서 경제 행정이 위축되는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결의안 68호가 등장합니다.
2. 결의안 68호, 민간경제를 최상위에 올리다
앞서 다뤘던 관료 마비라는 절박한 배경 위에서 2025년 5월 4일 하나의 결의안이 등장합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부연을 곁들이면, 결의안(Nghị quyết)은 베트남 공산당 정치국이 발행하는 베트남 정치 체제 내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정책 지침입니다. 이러한 결의안을 바탕으로 국회와 정부가 관련 법률과 시행령을 만들어 실행에 옮기는 구조이지요.
공산당 공식 문건에 등장한 낯선 표현
2025년 5월 4일, 또럼 서기장이 서명한 결의안 68호(Resolution 68-NQ/TW)는 도이머이 이후 베트남이 민간경제를 다룬 공식 문건 중 가장 파격적인 것으로 평가받습니다. 베트남 당국이 그동안 민간경제에 대해 어떻게 서술해 왔는지 그 변화를 한번 짚어보겠습니다.
2002년 결의안 14호: “중요한 구성 요소(an important component)”
2017년 결의안 10호: “중요한 원동력(an important driving force)”
2025년 결의안 68호: “가장 중요한 원동력(The most important driving force)”
23년에 걸쳐, “구성 요소”에서 “원동력”으로, 다시 “가장 중요한 원동력”으로. 표현의 무게가 단계적으로 올라갔습니다. 이를 단순하게 단어 하나가 바뀌었다고 해석하면 곤란합니다. 베트남 현행 헌법(2013년) 제51조를 보면, 여전히 헌법상으로 ”국가 경제(국영 부문)가 주도적 역할(vai trò chủ đạo)을 한다”고 명시돼 있어요. 즉, 베트남 헌법상 경제의 최상위 지위는 지금도 국영 부문에 있습니다. 그런데 68호가 민간경제를 “가장 중요한 원동력”으로 올린 건 헌법을 개정하지 않은 채 정치국 결의안으로 민간경제를 국영경제와 최대한 같은 급으로 끌어올리겠다는 의도를 암시합니다. 현존하는 공산국가(중국, 베트남, 쿠바, 라오스, 북한) 중에서 민간경제를 이렇게 공식적으로 최상위에 놓은 사례는 베트남의 결의안 68호가 유일합니다.
거기다가 결의안 본문에서는 기업인을 ”경제 전선의 군인”으로 명명하고 있습니다. 마르크스 선생님께서 들으시면 무덤에서 한 바퀴 구르실 일입니다. 자본가 타도를 외치던 사상 위에 세워진 나라에서, 기업인을 ‘경제 전선의 군인’이라 부르고 있으니까요.
결의안 내 비범죄화 조항, ‘형사처벌은 최후의 수단으로’
기업계가 실질적으로 가장 뜨겁게 환영한 부분은 결의안 내 비범죄화(Decriminalization) 조항입니다. 불타는 화로 캠페인 기간 동안, 기업 활동에서 발생한 경제적·민사적 분쟁이 형사 사건으로 격상되는 일이 드물지 않았습니다. 사업상의 판단 착오나 계약 분쟁이 수사 기관의 테이블 위에 올라가는 일들이 실제로 발생하곤 하였습니다.
결의안 68호 내의 비범죄화 조항은 “경제 관계를 형사화하지 말라”는 원칙을 훨씬 구체적이고 강력하게 못 박았습니다. 앞으로는 해당 조항에 따라, 기업 활동 중 발생한 경제적·민사적 위반에 대해 형사처벌이 아닌 경제적·행정적 시정 조치를 최우선 적용해야 합니다. 또한, 관련 법령 해석이 모호하면 형사 기소를 엄격히 회피해야 하고 형사 책임이 불가피한 경우에도 자발적 배상과 원상 복구를 구속 면제와 처벌 경감의 근거로 삼도록 했습니다. 무죄 추정 원칙도 수사 전 단계부터 엄격히 준수해야 합니다.
쉽게 말해, “혁신을 시도하다 실패했을 때, 감옥이 아니라 일단은 먼저 시정 조치가 온다”는 시그널입니다. 앞서 설명한 관료 마비, 기업인들의 투자 위축을 정면으로 겨냥한 조항이에요. 이는 베트남에서 활동하는 스타트업과 벤처 투자자 입장에서도 특히 의미가 큽니다. 새로운 사업 모델을 시도하다 실패했을 때, 그게 형사 리스크로 돌아올 수 있다면 아무도 도전하지 않겠지만, 비범죄화 조항은 “실패해도 감옥에 가지 않는다”는 안전망을 제도화한 셈입니다. 베트남에서 오래 활동해온 PE 하우스 Mekong Capital 또한 68호의 법적 보호 강화와 절차 간소화가 역사적으로 PE 투자 성장을 가로막았던 장벽을 줄여준다고 평가했습니다.
올인원 패키지, 선언에 그치지 않은 종합 선물 세트
선언만 거창하고 실속이 없으면 의미가 없겠지요. 68호에는 구체적인 인센티브 또한 명시하고 있습니다.
먼저, 기업이 R&D에 자비로 쓴 비용을 법인세 과세소득에서 200% 공제해줍니다. 쉽게 말해 베트남에서 1억을 쓰면 2억을 비용으로 인정해주는 거예요. 연간 수익의 최대 20%를 자체 R&D 기금으로 비과세 적립할 수 있고, 스타트업과 VC의 자본 양도 소득세는 전면 면제됩니다. 신규 중소기업은 사업자등록세 폐지에 초기 3년 법인세 면제. 산업단지 내 스타트업 전용 토지(최소 5%)도 확보하고 임대료 30%를 5년간 감면해주겠다는 내용도 들어 있습니다. 기업의 컴플라이언스 비용은 최소 30% 감축이 목표입니다. 완전히 올인원 패키지가 따로 없는 것이지요.
솔직히 하나하나 떼어놓고 보면 이러한 정책들이 아주 새로운 시도인 것은 아닙니다. 다른 나라에서도 이미 개별적으로는 유사한 정책들이 존재하지요. R&D 200% 공제는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태국에도 있고, 스타트업 세제 혜택도 각국이 경쟁적으로 내놓고 있습니다. 그런데 68호가 특별한 건 이걸 하나의 문건에 전부 묶었다는 겁니다. 이 정도 규모의 ‘올인원 패키지 종합 선물 세트’를 단일 결의안 하나로 쏟아낸 사례는 각국의 스타트업 생태계를 살펴 보아도 흔치 않습니다.
이에 따른 2030년 목표 수치도 명확합니다. 활성 기업 200만 개(현재 94만), 글로벌 대기업 20개 육성, 민간 부문 GDP 기여도 55~58%, 노동생산성 연 8.5~9.5% 성장. 여기서 우리는 ’20개 대기업 육성’이라는 목표에 대해 더 자세히 다루어 보겠습니다.
3. 재벌(Chaebol)을 만들겠다는 베트남의 선언
정책 설계자가 직접 쓴 해설지
2030년까지 글로벌 대기업 20개를 키우겠다. 시장에 맡기는 게 아니라, 국가가 나서서 소수의 기업을 골라 집중 육성하겠다는 겁니다. 이 구상을 가장 직설적으로 설명하는 문건이 있습니다. 베트남 현지 유력 PE VinaCapital이 2025년 5월에 낸 Economist’s Note, “Resolution 68: A New Dawn for Vietnam’s Private Sector”라는 보고서입니다. 해당 보고서는 68호 발표 직후 나온 분석으로, 68호의 핵심을 세 가지 축으로 정리합니다.
첫째, 민간기업에 대한 인센티브와 대형 복합기업 육성.
둘째, 그동안 국영기업과 FDI가 누리던 특혜를 민간에도 동등하게 적용.
셋째, 국영기업 지분의 전략적 민간 매각.
그러면서 이 모델을 한국의 대기업들이 국가 발전을 견인한 것과 같은 ”재벌 영감 모델(chaebol-inspired model)”이라고 명시합니다. 영문 버젼의 보고서 원본에서도 Chaebol으로 명확히 표현하며 다른 나라의 대기업이 아닌 한국의 대기업 모델을 표방한다는 점을 명시적으로 짚고 있습니다.
이 보고서를 쓴 비나캐피탈의 CEO 돈람(Don Lam)은 총리 직속 자문기구인 민간경제발전연구위원회(PSD)의 부위원장이라는 사실이 가장 흥미롭습니다. PSD는 2017년 정부가 설립한 기구로, 민간기업의 기술·경영·금융 격차 해소와 법적 샌드박스, R&D 인센티브 설계를 담당하고 있어요. 즉, 정책 설계 테이블에서 직접적인 영향력을 보유한 전문가가 직접 작성한 보고서에서 “재벌 모델”이라는 단어를 쓴 거예요. 외부 관찰자의 비유가 아니라, 내부자의 해석에 가깝다는 것이지요.
재벌(Chaebol)을 표방하지만, 한국과 닮은 듯 다른 접근 방식
실제로 한국의 재벌 모델과 같은 걸까요? 비교해보면 결이 완전하게 같지는 않습니다. 한국의 대기업 그룹은 1960~80년대 정부 주도 산업화 과정에서 특정 산업에 전략적 지원이 집중되고, 그 안에서 실적을 증명한 기업들이 점차 규모를 키워가며 형성된 것에 가깝습니다. 그 과정과 결과에 대한 평가는 지금도 다양하지만 적어도 “대기업을 몇 개 만들겠다”는 숫자 목표를 먼저 내걸고 시작한 구조는 아니었습니다.
베트남은 반대의 순서를 표방했습니다. 공산당이 먼저 “민간 대기업 20개를 만들겠다”고 목표를 선언하고, 국영기업 지분까지 민간에 매각하면서 위에서 아래로 설계하고 있습니다. 팜민찐 총리가 민간 대기업 성장에 ”어떠한 제한도 두지 않겠다(no limits)”고 거듭 천명한 것도 이 맥락입니다.
현재 가장 유력한 후보군은 호아팟(Hòa Phát, 철강), 빈그룹(Vingroup, 복합), 비엣젯(Vietjet, 항공), FPT(IT) 같은 기업들입니다. FPT는 2024년 해외 IT 서비스 매출 급증에 힘입어 총매출 약 24.7억 달러를 기록했고 비엣젯은 같은 해 전년 대비 47% 성장이라는 실적을 찍었습니다. 이미 글로벌 무대에서 차츰 실력을 증명해 보이고자 하는 기업들이고, 정부 정책에 적극 호응하며 덩치를 키우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베트남에는 삼성이나 현대처럼 글로벌 시장에서 이름만으로 통하는 민간 대기업이 없습니다. 아직은 그 어떤 베트남 기업도 글로벌 시장에서 눈에 띄는 성과를 만들어내지는 못했으니까요. 경제 규모에 비해서, 간판 기업이 부재하다는 사실은 베트남의 굉장히 오래된 과제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68호의 대기업 육성 구상은 방법론에 대한 논쟁은 있을 수 있지만, 방향 자체는 베트남 경제의 다음 단계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시도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4. 68호를 실행할 단 한 명의 경제 전문가
최연소 중앙은행 총재에서 수상 후보로
68호와 재벌 육성이라는 거대한 경제 실험이 설계도로만 남지 않으려면 이걸 실제로 집행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거시경제를 안정시키면서 동시에 성장 드라이브를 거는, 쉽게 말해 액셀과 브레이크를 동시에 다룰 수 있는 사람이 필수적이지요.
레민흥(Lê Minh Hưng). 정치국 서열 4위, 현 당 중앙조직부장, 4월 국회에서 수상 인준이 유력한 인물입니다. 레민흥은 1970년생으로 베트남국립대를 졸업한 후 일본으로 유학길에 올라 경제학·공공정책학 석사를 취득한 지식인 계열 테크노크라트입니다. 2016년 46세의 나이로 베트남 역사상 최연소 중앙은행(SBV) 총재에 올랐고, 2020년까지 재임하면서 베트남의 환율 관찰대상국 지정 위기 속에서도 환율 위기를 안정적으로 방어하고 인플레이션을 억제한 인물이기도 하지요. 이후 당 중앙사무처장을 거쳐 국가 핵심 인사권을 쥔 중앙조직부장으로 발탁됐습니다.
19명 중 경제를 아는 사람이 단 한 명 뿐인 구조
레민흥이 특별한 이유는 단순히 이력서가 화려해서가 아닙니다. 정치국 안에서의 구조적 희소성 때문입니다. 정치국(Politburo)은 베트남 공산당의 최고 의사결정 기구로, 아주 아주 단순화하여 표현하자면 베트남 내의 서열 1위부터 상위 20여명으로 구성된 의사결정 기구입니다. 이번 14기의 경우에는 19명으로 구성됐는데, 이 19명이 사실상 베트남이라는 나라의 방향키를 쥐고 이끄는 핵심 의사결정권자입니다. 이번 14기 정치국의 구성을 확인해보면 레민흥의 위치가 더 명확하게 눈에 띕니다.
14기 정치국의, 레민흥을 제외한 18인의 출신 배경을 직접 분류해본다면 아래와 같아요.
공안 출신 3명 (또럼 등)
군부 출신 3명
사법/감찰 출신 3명
당 조직/대중조직/행정 5명
외교 1명, 학술 1명, 기술관료(비경제) 1명, 기타 1명
다시 말해, 경제/금융 테크노크라트는 레민흥 딱 1명 뿐인 것이지요.
전체 정치국원 중 공안+군부+사법/감찰 출신이 9명으로 47%를 차지하는 가운데, 19명 중 거의 절반이 치안·사법 라인이에요. 70년대생 정치국원 중 그나마 경제·기술 분야 경력이 있는 인물은 서열 16위 쩐시탄(1971년생, 감찰 직무, 현 검사위원장), 서열 17위 응우옌탄응이(1976년생, 전 건설부 장관)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들의 현재 직위를 보면 감찰, 건설 부문이에요. 이처럼 순수하게 거시경제와 금융을 전공하고 그 전문성을 바탕으로 거시경제와 관련된 국정을 이끌었던 경력은 레민흥에게만 있습니다. 정치국 내 서열도 레민흥만 4위이고 나머지는 16위, 17위로 한참 아래에 있어요. 수상이라는 자리의 무게를 감당할 서열과 경제 전문성을 동시에 갖춘 인물은 사실상 레민흥뿐인 구조입니다.
4월 국회가 쏘아 올릴 본격적인 신호탄
3월 15일 총선이 이미 실시됐고, 새 국회는 4월 6일부터 25일까지 열리는 제16대 1차 회기에서 수상 인준을 포함한 주요 인사를 처리할 예정입니다. 만약 레민흥이 수상에 인준된다면, 그가 마주할 현실도 만만치 않습니다. 당 지도부가 설정한 연 10% 초고속 성장 목표를 실행해야 하는 동시에, 미국의 관세 압박에 대응하고, 쯔엉미란 사태 이후 취약해진 금융 시스템 건전성도 회복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미 SBV 총재 시절 리스크 관리 역량을 증명한 바가 있으며, 시장이 그에게 신뢰를 보내는 이유가 있습니다. 레민흥의 수상 취임 여부는, 이 거대한 경제 실험이 본격화되는 신호탄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필자 의견
필자는 이번 결의안 68호를 상당히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앞서 짚었듯이, 베트남에는 아직 글로벌 시장에서 이름만으로 통하는 민간 대기업이 없어요. 경제 규모에 비해 간판 기업이 부재하다는 건 오래된 과제였고, 그 과제를 정면으로 겨냥한 결의안이 나왔다는 것 자체가 의미 있는 진전입니다.
다만, 설계도가 아무리 훌륭해도 관건은 결국 실행력입니다. 베트남에서 정책 문서와 현장 사이의 거리는 늘 존재해왔어요. 비범죄화 원칙도 2017년에 이미 관련된 내용이 언급된 적이 있지만, 현장에서는 수년간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68호가 이전과 달리 실질적으로 작동할 수 있을지는 신중한 접근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68호가 표방하는 재벌 모델 자체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지점이 있습니다. 한국의 재벌은 경제 성장의 핵심 엔진이었지만, 동시에 경제력 집중, 하청 구조, 지배구조 문제 같은 부작용도 함께 남겼습니다. 베트남이 ‘재벌 모델’의 성장 동력은 가져가면서 그 부작용은 피할 수 있을지, 줄타기가 쉽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정책은 나왔고, 방향은 충분히 의미있다고 봅니다. 이제 그 실행의 과정을 유심히 지켜볼 차례입니다.
마무리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1편에서 다뤘던 통치 구조 재편은 “판을 바꾸는” 작업이었습니다. 이번 2편의 결의안 68호와 레민흥은 ”바뀐 판 위에서 어떤 카드를 깔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정책은 나왔고, 그것을 실행할 인물의 윤곽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다음 질문은 자연스럽습니다. “이 설계도대로 진짜 자본이 실제로 움직일 것인가?” 68호 이후 국가 VC펀드, 지방 정부 투자 펀드, 민간 CVC가 동시다발적으로 출범하고 있습니다. 다음 편에서는 이 자본 흐름의 구체적 구조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베트남이 다른 나라보다 늦게 출발했지만, 어떤 방식으로 차별화하려 하는지. 정치적 의지가 실제 자본으로 전환되는 메커니즘을 풀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